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파과> 리뷰 – 상처 위에 핀 정의, 혹은 복수의 그림자

by 별책별하 2025. 6. 9.

영화 파과
영화 파과

주먹보다 날카로운 감정의 진폭

영화 <파과>는 ‘여성 킬러’라는 소재만으로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울림은 단순한 장르적 쾌감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인공 ‘박로사’는 60대 여성 킬러입니다. 이 설정은 이미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시선이며, 더 나아가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사회의 여러 편견과 경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액션의 영역은 남성의 것이었고, 나이 든 여성은 배제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파과>는 그런 구도를 과감히 부수며 '노년의 여성도 주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정중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전달합니다.

영화는 은퇴를 앞둔 킬러 박로사가 마지막 임무를 앞두고 한 소녀와의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됩니다. 이 소녀는 가정 폭력과 학교 내 집단 괴롭힘 속에 방치된 존재이며, 박로사는 그 안에서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게 됩니다.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킬러라는 인물이 단순히 '죽이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정의와 복수 사이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인물이며, 그 이중성과 모호함이 이 작품의 핵심 정서를 이룹니다.

박로사는 냉정하고 고요한 인물이지만, 그 속에는 거대한 감정의 지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영화 내내 억제되다 끝내 터지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옵니다. 영화는 액션의 폭력성보다 감정의 폭발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그래서인지 총성이 울려도, 피가 튀어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녀가 소녀와 조용히 국밥을 나누는 순간이거나, 밤길을 함께 걷는 장면처럼 감정이 오가는 찰나의 교감입니다.

폭력은 누구의 것인가 – 여성 서사의 새 지점

<파과>는 묻습니다. 폭력은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폭력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영화는 명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합법화되고 정당화되었던 '폭력의 규칙'에 균열을 냅니다. 박로사의 폭력은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보호적이며, 파괴적이면서도 구원의 성격을 띱니다. 이중적인 지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과 동시에 새로운 이해를 끌어냅니다.

무엇보다 박로사라는 인물은 고립된 여성이지만, 그 고립은 단순히 외로움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구축한 생존의 전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그녀는 자신을 약자로 여기지 않고,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가 소녀를 만나 흔들리고, 약해지고, 동시에 강해지는 과정은 단순한 감정선의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구성하는 과정이자, 삶의 목적을 새롭게 정립하는 방식입니다.

이 작품은 누군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박로사는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의 윤리와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주체로 변화합니다. 이 변화는 영화 전체의 구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축이 됩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선택이 어떤 윤리적 무게를 지니는지, 어떤 상처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명확히 느끼게 됩니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 그리고 침묵의 잔상

배우 이정은은 박로사라는 인물의 내면을 과장 없이, 그러나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 숨어 있는 감정의 결, 누군가를 쏘아보는 듯한 시선 뒤에 숨은 슬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체구 속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서는 깊이를 가집니다. 이정은이라는 배우가 지닌 무게감은 영화 전체의 템포를 잡아주고, 관객이 박로사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이 영화는 크게 소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이 많은 영화입니다. 인물들 사이의 대화도 최소화되어 있고, 설명적인 장면보다는 함축적인 시퀀스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침묵입니다. 카메라는 말없이 인물을 따라가며, 관객 역시 조용히 그녀의 발자취를 함께 밟아나갑니다.

<파과>는 누군가의 인생이 이미 ‘깨진 열매’처럼 부서졌다고 느껴질 때, 그 조각들 위에서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제목 ‘파과(破果)’는 문자 그대로는 ‘상한 열매’를 뜻하지만, 영화는 그 상처 속에서도 여전히 가치와 온기가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에서 불가피한 폭력을 만나게 되지만, 그 폭력이 인간성을 모두 앗아가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이 영화에 깃들어 있습니다.